미리 고백하건대, 사실 에디터는 성인이 된 후 슈트를(하다못해 슈트 스커트조차도) 제대로 갖춰 입어본 적이 없다. 하물며 입사 면접 때도 당당하게(?) 청바지를 입었다. 괜히 늙어 보이지 않을까라는 우려와 완벽하게 스타일링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도 은근 작용했던 것 같다. 슈트는 늘 내 옷이 아닌 남의 옷이겠거니, 직장이라는 전장의 전형적인 전투복쯤이거나 성인 남자의 ‘교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몸을 가리는 의복의 한종류라고 여겨왔다. 사실 런웨이를 제외하면 슈트발이 끝내주는 현실의 남자를 본 경우도 거의 없다. 하물며 슈트를 완벽한 스타일링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자를 본 일 또한 없다. 몇 달 전 생애 처음으로 세퍼레이트 슈트에 티셔츠를 입고, 나름 기지를 발휘한 쿨다운 스타일링의 일환으로 스니커즈를 신은 채 출근한 적이 있다. 사내 광고팀의 A 과장님이 “아빠 옷 입었네?”라는 한마디를 날린 채 유유히 사라졌다. ‘역시 슈트는 나랑 어울리지 않아. 특별한 날에나 갖춰 입는 옷이지’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슈트를 더 멀리하게 됐다. 스스로 규정한 이미지 탓이었을까? 슈트는 섹시하거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자들만 입는 옷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런데 다시금 슈트를(그것도 데이웨어로)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번 시즌 막스마라의 런웨이를 보고 난 뒤였다. 모델 마리아 칼라가 핀스트라이프 슈트를 말끔하게 차려입고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트렌치코트를 어깨에 시크하게 걸친 채 캣워크를 당당하게 걷는 모습은 머리가 멍할 정도였다. 이 런웨이를 보면서 ‘그래, 저거야. 나도 저렇게 입어야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될까?

이번 시즌 슈트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지울 신선한 스타일링 방식은 막스마라뿐 아니라 다양한 브랜드에서 엿볼 수 있다. 프라다는 이번 시즌 트렌드 소재인 벨벳을 그래니 룩으로 재해석한 슈트를 선보였는데, 여기에 스틸레토 힐이 아닌 캐주얼한 스트랩 슈즈를 스타일링한 점이 돋보인다. 니나리치는 페미닌한 레이스와 강렬한 가죽 아이템을 슈트와 믹스매치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MSGM이다. 슈트 특유의 섹시함이라든가 매니시함과는 상반된 슬로건을 더한 볼캡과 화이트 앵클부츠를 매치한 것부터 핀스트라이프 패턴의 보 장식 셔츠로(리본은 한쪽으로만 묶어 시크함을 발산했다) 포인트를 준 것까지 어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오피스 룩에 ‘유스’라는 트렌드를 더한 볼캡과 나일론 소재의 백을 매치한 파격은 덤이다. 생각해보면 대중은 꽤 오래전부터 ‘슈트 입은 여자’를 동경해왔다. 모든 패션사의 신드롬은 ‘파격’에서 비롯되는 법. 대중이 사랑하는 스타들이 이러한 ‘파격’을 이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971년 세계적인 록 밴드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와 결혼한 비앙카 재거는 자신의 결혼식에서 순백의 턱시도 슈트를 입어 새로운 웨딩 룩의 장을 열었다. 2020년이 가까운 지금도 ‘결혼식=웨딩드레스’를 떠올릴 정도로 정형화된 신부 패션에 스모킹 슈트를 입은 그녀의 패션은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또 여성의 아름다움을 ‘남성’ 패션으로 재해석한 패션의 아이콘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도 빼놓으면 섭하다. 독일 출신 최초의 할리우드 스타 마를렌 디트리히는 특히 매니시한 남성 슈트를 즐겨 입기로 유명했다. 그녀는 자신의 패션 세계에 대해 “I dress for myself, not for image, not for public, not for fashion, not for men”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오롯이 자신을 위해 슈트를 입는다는 그녀의 코멘트는 지금 들어도 사이다같이 톡 쏘는 명언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슈트는 언제부터 대중화됐을까? 그 옛날 여성의 자아는 성(性) 불평등으로 꽤나 억압돼 있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남녀 불평등이 패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하던 시대가 아닌가? 이 지점에서 남성에게만 허용되던 사회 진출과 권력을 여성에게 의상으로 표출하게 해준 코코 샤넬과 이브 생로랑의 ‘르 스모킹(Le Smoking)’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1920년대는 페미닌한 드레스가 사교계를 잠식하던 시절. 샤넬은 자신이 직접 모델이 돼 스리피스 슈트에 볼러를 착용하고, 테일러가 더해진 남성용 승마복을 입는 과감함으로 시대에 맞섰다. 또 남성 노동자 의복에 사용하던 패치 포켓 디자인을 여성복 슈트에 도입하거나 퀼팅 기법을 백에 적용한 점은 당대의 꽉 막힌 패션 틀에서 벗어난 가히 ‘혁명’과도 같았다. 이브 생로랑은 또 어떤가? 과거 고급 사교 모임에서 남성들이 담배를 피우며 담소 나눌 때 입는 옷이라는 ‘스모킹 슈트’에서 착안해 1966년 여성만을 위한 슈트 컬렉션 ‘르 스모킹’을 발표한 그의 기지는 실로 파격적이었다. 말 그대로 ‘여성 해방’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아직도 프랑스에서는 남녀가 같은 슈트를 자유자재로 입을 수 있게 만든 이브 생로랑을 기념하며 여성용 턱시도를 ‘이브’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려 한 세기에 걸쳐 진화한 여성 슈트는 2017년 지금, 가장 세련된 패션 하우스와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쳐 가장 동시대적이고 쿨한 트렌드의 정점에 올랐다. 이쯤 되면 간단한 스타일 공식이 나온다. 이번 가을은 스리피스로 중무장한 매니시 슈트 하나쯤은 옷장 속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 영화 <미스 슬로운>에서 주인공 ‘슬로운’이 입고 나온 매니시한 슈트에 스틸레토 힐을 더한 슈트 패션의 정석도 좋고, 이번 시즌 런웨이에서 선보인 다양한 믹스매치 스타일링도 더할 나위 없다. 고급스러운 테일러드로 중무장한 명품 슈트 브랜드가 아니어도 좋다. 가장 중요한 건 꼭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슈트를 자유자재로 스타일링할 수 있는 새로운 클래식의 일환으로 여기는 태도, 바로 그것이다. 자, 이제 당신도 ‘슈트 입는 여자’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할 준비가 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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