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 나온 여배우의 소신 발언이 기억난다. “이사를 할 때 봤더니 쓸데없이 많은 옷이 있는 것 같아 옷장이 단출해 보일 정도로 적은 양만 남겨뒀는데, 충분히 돌려 입을 만하더라. 혹시 방송 출연때 같은 옷이 반복되더라도 양해해달라”는 내용이다. 오래전부터 환경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피력하고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배우 박진희의 이야기다. 가장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에 선 여배우로서는 결코 쉽지않았을 일이다. 그녀의 말처럼 환경을 파괴하는 주범 중 하나는 의외로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다. 브랜드와 미디어는 발 빠르게 트렌드를 만들며 시즌마다 새로운 소비를 권하고, 규모의 경제로 대량 생산되는 시스템 아래 언제든 옷을 쉽게 살 수 있다. 쉽게 산 옷은 이내 잊히고 방치된다. 그때부터 옷은 더 이상 패션 아이템이 아닌 쓰레기가 된다.

아무리 이름 있는 고가의 옷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면 농사, 양 사육, 염색 공장 등 전통적인 산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퍼진 이런 공정들은 어쩔 수 없이 환경 파괴 문제를 안고 있다. 모두가 동참해야 개선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이슈 앞에서 패션계 역시 ‘지속 가능한 패션’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움직임이 제법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 전에는 브랜드별로 환경 이슈를 마케팅적으로 활용하는 느낌이 강했다면, 이제는 나아갈 방향, 지속 가능한 생존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분위기다. 패션 기업, NGO, 학자 등이 모여 물 오염 방지, 염료 사용의 문제, 경작지에서의 살충제 사용 문제 등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실행 방침을 만들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공동의 노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코펜하겐 패션서미트’ 같은 행사도 개최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구찌와 퓨마 등의 본사인 케링, H&M 계열과 아디다스, 자라 계열의 인디텍스, 노스페이스와 반스의 본사인 VF 코퍼레이션 등 많은 패션 기업과 리테일 체인이 참가한다.

의류 폐기물에 대한 고민을 가속화한 주범으로 지적되는 H&M이나 자라등의 패스트 패션 브랜드. 이들은 대량 생산, 빠른 리뉴얼, 저렴한 가격으로 패션을 마치 인스턴트식품처럼 단기적 소모품으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ASOS’나 ‘BOOHOO’ 등 한 달 안에 새로운 제품을 선보이는 이른바 ‘울트라 패스트 패션’ 브랜드까지 등장했다. 그런 만큼 많은 비난과 감시의 눈길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유로 지속 가능한 패션 분야에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대표적인 것이 지속 가능한 소재를 활용한 제품을 선보이는 H&M의 컨셔스 컬렉션이다. H&M은 환경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소재를 찾는 글로벌 체인지 어워드도 개최하는데, 2015년에는 오렌지 껍질을 가지고 만든 오렌지 패브릭이 당선됐고 시장에도 출시됐다. 페라가모는 올해 지구의 날에 이 소재를 가지고 럭셔리 캡슐 컬렉션을 내놓기도 했다. 정반대 편에 서 있는 럭셔리 패션군도 환경 문제에 동참하는 분위기다. 꽤 오래전부터 친환경적 움직임이 브랜드의 주요 아이덴티티였던 스텔라 매카트니가 대표적이다. 소재의 50% 정도를 오가닉 코튼, 리사이클 나일론 등 지속 가능한 소스로 만들고, 모피는 물론 PVC도 사용하지 않는다. 얼마 전 선보인 광고 캠페인은 스코틀랜드의 인공 쓰레기 매립지에서 촬영했는데 쓰레기로 뒤덮인 거대한 단지는 의류 과소비와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상기시킨다. 빅터앤롤프는 최근 몇 년째 리사이클 소재를 활용한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고, 마르니 역시 재활용 플라스틱을 이용한 제품이나 콜롬비아 농부들이 손으로 짠 바구니 등 친환경적 제품을 내놓고 있다. 베트멍은 의류 과소비로 인한 환경 파괴를 지적하기 위해 미국 뉴욕 삭스 피프스 에비뉴 백화점에 헌 옷 더미를 쌓은 디스플레이를 펼쳐 메시지를 전한 바 있으며, 키즈 브랜드 보보쇼즈는 지구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은 캠페인을 전개하기도 했다.

나이키 등 스포츠웨어 브랜드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에 비해 쓰레기를 약 60% 감소시키는 제조 방식으로 제품을 출시하고 있으며, 태생부터 환경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제품을 만들어온 파타고니아는 새 옷을 사지 말고 가지고 있는 옷을 고쳐가며 오래 입자는 내용의 ‘원 웨어(Worn Wear)’ 캠페인을 꾸준히 벌이고 있기도 하다(이 캠페인과 연계해 자사의 중고 옷을 수거해서 수선한 다음 다시 판매하는 사이트도 론칭했다). 이렇듯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패션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브랜드가 늘고 있다. 오랫동안 패션 브랜드들은 특정한 이미지를 강요하고 그걸 따라오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왔다. 자연스레 대중은 남에게 보이는 모습에 신경을 곤두세웠고 건강을 해치며 다이어트를 하거나 최신 트렌드라는 이유로 필요하지 않은 옷을 구매하곤 했다. 희망적인 건 기존 상업적 브랜드들이 강조해온 일련의 것들을 부정하는 분위기가 점점 조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남성성이나 여성성 같은 젠더 편견을 드러내는 광고가 금지되고, 지나치게 마른 모델은 캣워크를 할 수 없게 되었으며, 환경을 해치는 소재를 사용하는 브랜드는 비난과 제재를 받고 있는 것 등이다.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들은 이제 오래된 파타고니아의 플리스, 타미 힐피거의 빈티지 점퍼, 빛바랜 청바지, 후줄근해진 오가닉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셀레브러티들은 공식 석상에서 스텔라 매카트니의 오가닉 드레스나 재고 옷감으로 만든 베트멍의 옷을 입는다. 이는 ‘상업적 트렌드에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의식의 표현과도 같다. 대중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당당한 애티튜드에서 스타일리시한 매력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다양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지속 가능한 패션은 마케팅일 뿐이라는 비난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지속적인 시도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 더욱 중요한 건 옷을 사 입는 소비자의 의식이다. 아무리 의미 있는 소재로 만든 옷을 내놓고 서미트를 개최한다 한들, 옷을 입는 사람들이 이전과 다를 게 없다면 소용없다. 세상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고 ‘나 하나쯤이야’가 아니라 ‘나부터 먼저’라는 인식으로 스스로를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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