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바람이 부는 겨울이 오니 자연스레 ‘캐시미어 니트’가 떠오른다. 언제부터 캐시미어가 당연하게 사고 싶은 소재가 됐을까? 아마도 ‘8만9900원’이라는 매력적인 가격대를 내세워 일명 ‘가성비 캐시미어’를 선보였던 유니클로가 상징적인 역할을 한 듯하다. 캐시미어를 이야기하며 ‘가성비’라는 단어를 붙이게 된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간은 로로피아나, 브루넬로 쿠치넬리, 에르메스 등 고가의 명품 브랜드에서 주로 다뤘던 고급 소재로, 캐시미어로 만든 제품은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가격대라 대중적으로 두루 사랑받기보다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게 사실. ‘섬유의 보석’이라고 불릴 정도로 최고급 소재인 캐시미어는 채취 과정부터 까다롭다. 양의 털을 기계로 깎아 얻는 일반 양모와 달리 산양이 털갈이를 하는 시기에 맞춰 빗질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털을 골라내 부드러운 캐시미어 원사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수작업을 통해 산양 한 마리에서 취할 수 있는 캐시미어는 200g 안팎에 불과하다. 캐시미어로 된 스웨터 한 벌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 4마리의 산양이 필요한 셈. 귀하고 비싼 재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전 세계의 산양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희소성까지 더해져 비싼 소재로 인식되어왔다. 이토록 어렵게 얻은 캐시미어는 일반적인 털보다 부드럽고 가벼우며 보온성이 3배 이상 뛰어나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등 합성 섬유로 된 니트의 까끌함이 없어 아토피 피부에도 부담이 없고 천연 소재라 알레르기 비염을 유발하는 먼지 걱정도 없다. 비싸지만 매력적인 소재다.가격 장벽으로 대중과는 거리가 멀었던 캐시미어가 국내에서 존재감을 내비치기 시작한 것은 약 2~3년 전부터다. ‘더 캐시미어’ ‘르 캐시미어’와 같이 캐시미어에 집중한 브랜드가 등장하자 캐시미어를 잘 몰랐던 사람들마저 이 소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후 소재에 힘을 주면서 기존 패스트 패션의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각종 SPA 브랜드에서 캐시미어를 활용하기 시작하며(합리적인 가격대를 내세운 것은 물론이다) 빠르게 트렌드로 올라섰다.이런 캐시미어 트렌드는 올해 들어 더욱 가파르게 치솟으며 본격적으로 캐시미어의 대중화가 시작됐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홈쇼핑, 온라인 쇼핑몰 등 합리적인 쇼핑을 제안하는 플랫폼에서 캐시미어를 올 시즌 화두로 삼았다는 점이다. CJ오쇼핑에서는 이번 시즌 몽골 캐시미어 업체인 ‘고비’를 단독으로 선보이며 방송 5회 동안 주문 금액 70억원을 달성했고, 롯데홈쇼핑은 ‘일상 속 럭셔리’라는 콘셉트로 캐시미어 니트, 숄, 롱 코트 등을 선보이는 자체 브랜드 ‘LBL’을, 현대홈쇼핑은 100% 캐시미어를 내세우는 자체 브랜드 ‘라씨엔토’를 론칭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홈쇼핑 입장에서는 고급화를 구현하기 위한 전략으로 캐시미어를 선택했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비싼 캐시미어 제품을 충분히 접근할 만한 가격대로 구매해 일명 ‘어포더블 럭셔리(affordable luxury)’를 구현할 수 있기에 시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11번가에서는 자체 브랜드 ‘레어하이’를 통해 캐시미어 니트를 7만원대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모두 대량 주문을 통한 단가 절감, 유통 과정의 간소화 등으로 대중에게 맞춘 가성비 좋은 캐시미어 제품이다. 오프라인 스토어인 신세계백화점에서도 캐시미어의 상품성에 주목해 자체 브랜드 ‘델라 라나’를 론칭했다. 상품 기획부터 디자인, 제작, 판매를 모두 자체적으로 해결하며 기존 백화점에서 다뤘던 브랜드 제품의 절반 가격대로 합리성을 내세운 것이 특징. 이러한 규모의 경제를 내세운 브랜드들과 함께 캐시미어 시장 자체를 더욱 넓히는 데 일조한 건 캐시미어에 특화된 전문 브랜드들이다.

​

​

몽골 현지인과의 네트워크로 지속 가능한 캐시미어 산업을 내세운 ‘르 캐시미어’부터 몽골 캐시미어 공급 업체인 모기업을 배경으로 한 캐시미어 전문 브랜드 ‘주느세콰’, 신생 캐시미어 브랜드인 ‘The Fundamental Things’, 디자이너 박은솔의 캐시미어 브랜드 ‘제니팍’, 인도산 캐시미어로 스카프를 전문으로 다루는 ‘말메종’ 등 다양하다. 여기에 한섬 출신 니트 디자이너 김정은의 ‘리플레인’, 30년 내공의 니트 디자이너 유명해의 ‘마레디마리’ 등 각종 니트 브랜드에서도 캐시미어를 매력 있게 다루며 소비자에게 캐시미어 제품의 선택권을 넓혀줬다. 지금 패션 시장에서는 기성 브랜드부터 SPA 브랜드, 캐시미어 전문 브랜드 등 수많은 곳에서 크고 작게 캐시미어를 다루다 보니 제품마다 퀄리티나 가격대가 천차만별인 것이 사실. 그 때문에 좋은 캐시미어를 제대로 고르려면 함유량이나 원산지 등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캐시미어 100%’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면 상당수의 제품이 캐시미어가 적게는 5%부터 60% 정도까지 함유된 혼방 형식으로 가격대를 낮췄다. 또 캐시미어의 원산지에 따라 가격대가 달리 책정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원산지는 춥기로 소문난 몽골, 네팔, 스코틀랜드, 내몽골(중국) 등이다. 이 중에서도 몽골산이나 스코틀랜드산이 고급으로 취급된다. 원산지를 기준으로 살펴보는 것도 좋은 캐시미어를 고르는 방법이지만, 브랜드에 따라 원사의 출처보다 후 가공에 더욱 신경을 쓰고 디자인적인 감각을 더해 제품의 퀄리티를 높이기도 하니, 어디에 더 중점을 둘지는 선택의 문제다. 제대로 된 제품을 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잘 관리하는 것이다. 너무 자주 입거나 자주 빠는 것은 지양하는 게 좋다. 2~3일에 한 번씩은 캐시미어가 충분히 숨을 쉴 수 있도록 텀을 두며 입을 것, 틈틈이 빗질로 보풀을 정리해주고 전용 세제를 써서 무리하게 비틀지 않는 선에서 손빨래를 한 후 그늘에서 말려주는 것만 지켜도 충분하다. 잘만 관리하면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기에 지속 가능한 패션을 구현할 수 있다는 명분까지 있다. 특별한 누구의 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 된 캐시미어. 그 매력에 빠지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

지속 가능한 패션을 말하다

유동주_르 캐시미어 대표

일률적인 기성 패션에 지루함을 느낀 사람들은 패션 속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갈구하고 있다. 나만 아는 디자이너의 브랜드를 발굴해 자신만의 공고한 취향을 쌓기도 하고, 더 나아가 가치 있는 소비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르 캐시미어는 후자에 가깝다. 전 세계적으로 캐시미어의 원료가 한정적이라는 것에 주목해 ‘지속 가능한 캐시미어’를 슬로건으로 내건 브랜드로, 론칭 이후 국내 캐시미어 시장의 전문성을 높이고 있다. 르 캐시미어의 유동주 대표는 UN을 비롯한 국제기구에서 오랜 시간 저개발 국가를 중심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캐시미어 사업에 진출했다. 그는 몽골 사막에서 나무를 심는 사업을 진행할 때 우연히 캐시미어를 접하게 됐는데, 캐시미어의 원료를 제공하는 산양이 식물의 뿌리까지 뽑아 먹어 몽골 땅을 사막화시키는 주범인 동시에 유목민들의 유일한 생계 유지 수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급속한 사막화를 막고, 현지인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방향을 생각하며 유 대표는 가장 먼저 현지에서 생산자 연합을 구성했다. 그들과 함께 시기별로 방목 지역을 순환하며 목초지에 적당히 휴지기를 갖게 하고, 생산자들이 직접 브랜드를 론칭하도록 도와 자립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르 캐시미어는 그들로부터 안정적으로 원료를 수급하고, 유통 단계를 줄여 좋은 품질에 합리적인 가격을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기존의 ‘지속 가능한’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들의 이미지가 패셔너블하다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었던 것에 반해, 르 캐시미어를 패션 브랜드 자체로서 매력적이게 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환경과 관련된 일을 하며 ‘지속 가능한 패션 컨퍼런스’를 진행했을 때 인연이 됐던 이탈리아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해서다. 내년 초에는 서울 성수동에 제품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고 캐시미어를 비롯해 지속 가능한 소재, 패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가 있는 체험형 공간도 오픈한다. 그가 이야기하고픈 지속 가능한 소재는 라이프와 관련된 ‘르 홈’, 코튼 소재를 다룬 ‘르 코튼’ 등 다양한 형태로 이어질 예정이다.

​

캐시미어에 깃든 디자이너의 감성
박은솔_제니팍 디자이너

캐시미어라는 좋은 소재와 디자이너의 남다른 감성이 만나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어떤 모습일까. 디자이너 박은솔이 전개하는 캐시미어 중심의 브랜드 제니팍은 이런 발상으로 생겨났다. 오랜 시간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그녀는 그곳에서 합리적인 가격대의 캐시미어 소재로 만들어진 옷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캐시미어의 매력을 접하게 됐다. 한번 입으면 특유의 부드러운 감촉과 뛰어난 보온성 때문에 계속해서 찾게 되는 것을 보며 캐시미어를 활용한 패션을 선보이겠다고 결심했고, 캐시미어가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던 2011년에 제니팍을 국내에 론칭했다. 당시에는 니트, 카디건 정도의 심플한 구성에 F/W 시즌에만 한정적으로 신제품을 선보였다. “론칭했을 때만 해도 캐시미어만 다루는 브랜드는 아예 없었어요. 그때는 캐시미어가 젊은 감성의 합리적인 소재가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캐시미어는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였기에 천천히 조금씩 제품군을 늘리며 지금까지 오게 됐죠.”그녀가 말하는 캐시미어의 매력은 ‘에포트리스(effortless)’다. 멋을 부리지 않아도 소재가 지닌 은은한 윤기와 차분한 매력이 충분히 멋스러운 것. 여기에 평소 나뭇결이나 1950~60년대 선보였던 모던 아트의 색감 등 자연스럽고 온화한 것에서 영감을 얻어 그녀만의 감성적인 디자인을 전개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제니팍의 스타일에는 과도한 패턴이나 컬러가 없어 차분한 매력이 있다. 여기에 언밸런스한 절개나 등 부분의 V라인 트임 같은 포인트를 주어 밋밋하지 않은 게 특징이다. 클래식한 소재를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제니팍의 감성은 해외에서도 통했다. 지난해 F/W 시즌부터 온라인 쇼핑몰인 샵밥에도 입점해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이런 활약을 기반으로 꾸준히 캐시미어에 집중하되 캐시미어 소재와 잘 어울리는 스타일, 실크 스커트나 리넨 소재의 셔츠 등 매칭할 만한 아이템을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 미니멀하되 차별화할 수 있는 감성을 더하고자 하는 것. 어쩌면 캐시미어가 가진 속성과도 참 닮아 있다.

​

라이트 캐시미어의 세계
배보람_말메종 대표

말메종은 라이트 캐시미어를 소재로 한 스카프와 머플러 전문 브랜드다. 평소 우리가 알고 즐겨 입는 캐시미어는 해비 캐시미어다. 라이트 캐시미어는 그보다 가벼운 소재로, 얇고 긴 원사만 뽑는 채취 과정이 철저하게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게다가 높은 경력을 가진 마스터가 필요해 단가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그간은 명품 브랜드에서 제한적으로 다뤄왔던 소재다. 말메종을 만든 배보람 대표는 경영학도 출신으로 그간 컨설팅 및 마케팅 분야에서 활약하다가 인도 현지 법인 설립을 계기로 오랜 시간 인도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라이트 캐시미어를 알게 됐다. “산양의 몸 중에서 햇빛이 닿지 않는 목이나 배 부분의 털을 자연적으로 채취해 핸드메이드로 캐시미어를 만들던 것의 시초가 되는 지역이 바로 인도의 카시미르예요. 캐시미어라는 이름 역시 그곳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죠. 질 좋은 인도산 캐시미어는 과거 실크로드를 통해 이집트로 넘어갔고, 나폴레옹 1세가 이집트 원정을 갔던 당시 아내인 조세핀에게 캐시미어 숄을 선물했죠. 이후 왕실의 여인들에게 캐시미어 숄은 반드시 가져야 할 아이템이 됐을 정도로 꾸준히 사랑받아왔어요.”말메종은 웬만한 글로벌 캐시미어 관련 기업은 모두 소속되어 있다는 국제 캐시미어협회를 통해 검증받은 원사를 구매하고, 인도 현지의 캐시미어 관련 업체를 통해 제품을 만든다. 수작업과 기계 공정을 섞는 방식으로 생산비를 낮춰 기존 제품에 비해 낮은 가격대로 라이트 캐시미어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지금은 자체 온라인 몰을 비롯해 전국의 백화점에서 팝업 스토어 형태로 대중과 만나고 있다. “앞으로는 아티스트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해 저희 제품에 패턴을 넣기도 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 이들과도 협업을 전개할 예정이에요. 단순한 패션 아이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래 두고 꾸준히 사용하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라이프적인 관점으로 브랜드를 발전시키고 싶어요.”

​ 

​

컬러풀 캐시미어의 멋
박종우_TFT 대표

론칭한 지 채 1개월이 되지 않은 캐시미어 브랜드 ‘The Fundamental Things’(이하 TFT)는 짧은 기간 안에 빠른 속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전에 없던 스타일의 캐시미어 제품과 심플한 제품군, 합리적인 가격이 한 번쯤 TFT 제품을 돌아보게끔 만든다. TFT에서 선보이는 룩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에 없던 다채로운 컬러를 구현했다는 점이다. ‘와사비 그린’ ‘피기 핑크’ ‘얼 그레이’ ‘레드 불’ 등 재미난 이름을 가진 총 24가지 컬러로 구성되어 있으며 라운드넥 톱, 터틀넥 톱, 머플러로 나뉜 심플한 제품군 안에서 컬러 베이레이션을 펼치고 있다. 오래도록 OEM 방식으로 캐시미어를 다뤄왔던 국내 제조 회사와 손잡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더해 만들었다. 여기에 캐시미어를 보여주는 방식 역시 젊고 경쾌하다. 락앤락의 밀폐 용기에 제품을 담아서 제공하는데, 습기에 약한 캐시미어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도 보는 재미가 있어 눈길을 끈다. TFT가 전개하는 캐시미어의 기본은 ‘접근 가능한 럭셔리’다. 고가의 소재라는 이유로 다양한 사람이 즐기지 못했는데 오랜 기술력과 역사를 가진 제조 회사를 모기업 삼아 합리적인 가격대를 구현해냈다. 성인 여자의 캐시미어 톱이 13만원대로, 모든 제품이 15만원을 넘지 않는 수준. 이뿐 아니라 가장 자연적인 방법으로 얻은 캐시미어 원사를 세척하고 염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에 해로운 요소를 검증된 시스템을 통해 깐깐하게 감독하고, 일본의 장인으로부터 봉제선 없이 옷을 편직하는 기술을 전수받아 제품에 적용하는 등 그들만의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 “이 옷들을 만들며 크리스마스 때 온 가족이 모여서 가족 유니폼처럼 컬러별로 갖춰 입은 모습을 상상했어요. 부모님 세대부터 손자들까지 3대가 함께 즐겨 입는 옷이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죠. 캐시미어를 시작으로 앞으로는 코튼, 코즈메틱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근본적인 것을 전하는 제품을 만들어갈 계획입니다.”

<저작권자ⓒ제이콘텐트리 M&B_여성중앙.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