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오디오 가이드까지 대여해 열심히 작품을 감상하며 3분의 2쯤 봤을까? 짧고 가벼운 한숨과 함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 그리고 이때 느낀 바는 며칠 뒤, 호안 미로 미술관과 바르셀로나 현대 미술관에서 한 미국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을 보면서도 반복됐다. 피카소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며 재능이라는 단어도 그 앞에서는 소박해진다. 청소년 시기부터 남달랐던 그는 정말로 성실하게, 정력적이고 정열적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나에게 미술관을 달라, 전부 채워버릴 것이다’란 그의 말을 직접 증명하고도 남았다. 한 영역에서만 비범함을 뽐내도 칭찬이 쏟아질 마당에 데생, 유화, 추상화, 풍경화, 정물화, 조각 등 두루 빼어났다. 호안 미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익숙하게 본 추상화부터 갖가지 재료를 활용한 설치미술까지 줄지어 있었다.

‘특출하다’는 말의 정의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증명됐다. 전시장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천재라 칭송받는 이들도 이토록 착실하게 살았는데 평범하고 고만고만한 능력을 지닌 다수에 속한 나를 돌이켜봤다. 기계가 아니기에 생산성과 효율을 따지며 단순 비교하긴 어렵지만 말이다. 특출한 능력을 타고난다면 지금보다 간단명료하게 살 수 있을까? 피카소와 미로의 오라에 사로잡힌 그때, 자연스레 ‘효리네 민박 시즌 2’에서 이효리와 윤아, 그리고 성악을 전공한다는 손님의 대화가 떠올랐다. 실력이 특출하지 않은 것 같아 고민이라는 손님의 말에 이효리와 윤아 모두 공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니, 핑클로 데뷔해 한 시대를 집어삼키고 지금까지도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지닌 이효리와, 다시 나오기 어려운 걸 그룹으로 평가받는 소녀시대로 살아온 윤아마저 ‘특출한 능력’에 대해 고민할 줄이야. 물론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냉정하게 평가받는 연예인으로 살기에 전혀 짐작 못할 고민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톱스타로 커리어를 쌓아온 그녀들마저 고민한다면, 30대 후반에 들어선 이후에도 특출한 능력을 찾지 못해 매번 사상누각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일하는 나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싶었다. 사춘기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을지 어릴 때는 진짜 몰랐다. 음악, 문학, 미술 등 예술 분야에 주로 해당되지만, 형형하게 두드러지는 재능을 타고난 삶이 부러울 때가 종종 있다. 한 가지를 독보적으로 잘하면 아티스트가 될 테고 적당히 살아가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무난한 능력만 갖춘다면 끊임없는 고민이 뒤따를 수밖에 없을까? 이효리의 말처럼 윤아만큼 특출하게 예쁘기도 불가능한데 말이다. 남과 비교하는 것은 불행의 시작이며 그 비교가 지극히 소수인 아티스트, 연예인과의 비교라면 더 무용하지만, 요즘은 금광 캐내듯 자신의 요모조모를 캐내지 않으면 당장 미래를 걱정해야 한다. 어디서든 제 몫을 해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꾸만 스스로 들여다보고 미처 몰랐던 능력도 찾아야 한다.

서울의 ‘효리네 민박’과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마주치며 온종일 ‘특출하다’는 네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생각 끝에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든 명언, ‘소확행’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일상의 소확행이 있다면 개인에게는 ‘소확능’도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10년 동안 한 분야에서 일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 쌓여온 내공이 있을 것이다. 하다 못해 녹취를 푸는 속도는 대학 시절보다 훨씬 빨라졌다. 또한 특출한 재능이 없다며 괴로워하느니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과로 이끌기 위해 애쓰겠다. 사실 이 또한 어떤 의미에선 도피일 수 있다. 새로운 재능을 찾는 노력을 미뤄두겠다는 말과 같으니까. 더욱이 내가 해도 잘할 수 있어 보이는 일을 하는 타인의 성취를 보면서, 겨우 손바닥만 한 휴대전화로 들여다보면서 질투만 하는 협소한 인간은 정말이지 되고 싶지 않다. 고로 작지만 확실한 능력부터 구체적으로 찾은 다음 리스트를 작성하겠다. 학창 시절 종종 쓰던 자기소개서에는 장 단점을 쓰라던 항목이 꼭 있었는데 한동안 잊고 살았다. 잠시나마 스스로를 나노 단위로 파악하는 데 좋은 훈련이었던 셈인데 말이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나의 소확능은 탁월한 방향감각과 부지런한 인사성이다. 화분도 곧잘 키운다. 특출한 재능을 찾아가는 지도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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